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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미소라 히바리 - 한국계


 

9살에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사망하기까지 무려 1035곡, 월평균 2곡이라는 기록적인 활동을 했던

가수 미소라 히바리!

이 노래를 들으면 왜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52살 한창나이에 저 세상사람이 됬습니다

미소라 히바리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가수의 한사람입니다.

작곡자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아키라 미타케라는 사람입니다.

곡과 가사도 맘에 들지만, 미소라 히바리가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좋아하게 된 것같습니다.

계은숙이 짙은 일본식 창법인 반면, 미소라 히바리는 매우 한국적인 창법입니다.


[미소라 히바리] 美空 ひばり, 川の流れのように


시라즈 시라즈 아루이떼기타 호소쿠 나가이 고노미찌

知らず知らず 步いて來た 細く長い この道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왔네 길고도 좁은 이 길을

 

후리카 에레바 하루카 도오쿠 후루사또가 미에루 
振り返れば 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뒤돌아 보면 저만치 멀리고향이 보이고

 

데코보코 미찌야 마가리구 넷다미찌 치즈사에나이 소레모 마따 진세이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圖さえない それもまた 人生
울퉁불퉁한 길과 굽어진 길 지도조차 없지만 그것 또한 인생

 

아~ 가와노 나가레노 요우니 유루야카니 이꾸쯔모 지다이와 스기떼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아-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어느새 세월은 흘렀네

 

아~ 가와노 나가레노 요우니 도메도나쿠 소라가 하소가레니 소마루다께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空が黃昏に 染まるだけ
아-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그저 하늘이 황혼에 물드는 것뿐 이라네

 

 

(2절)

이끼루 고또와 다비스루고또 오와리노나이 고노미찌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りのない この道
살아간다는 건 길을 떠나는 것 끝도 없는 이 길을

 

아이스루히또 소바니 쯔레데 유메사가시나가라 아메니 후라레데 누까룬다 미찌데모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雨に降られてぬかるんだ道でも
사랑하는 이와 함께 꿈을 찾으며 비에 젖고 실패한 길이라도

 

이쯔까와 마따 하레루 히가 구루까라
いつかは 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언젠가는 다시 비가 개인 내일이 올테니까

 

아~ 가와노 나가레노 요우니 오다야까니 고노미오 마카세데 이타이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 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 가와노 나가레노 요우니 우쯔리유쿠 기세츠 유키도케오 마찌나가라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季節 雪どけを待ち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하는 계절,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아~ 가와노 나가레노 요우니 오다야까니 고노미오 마카세데 이타이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 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 가와노 나가레노 요우니 이쯔마데모 아오이세세라기오 기끼나가라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靑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까지라도 푸른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 

 
 

아리랑’을 불렀던 미소라 히바리 그녀를 다시 본다


교토의 미소라 히바리 자료관에서

글:김정동(목원대 교수, 문화재위원)

일본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 

 


▲ 미소라 히바리관 전경.

 

한 가수에 바쳐진 자료관


얼마전 교토에 가는 길에 나는 ‘미소라 히바리관’을 찾아갔다. 일본 가요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미소라 히바리도 흥미 있었지만 그 자료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전시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교토에서 기차를 타고 한 20분 가니 교외 분위기가 풍겼다. 아라시야마 역에서 내려 그 유명한 도월교(渡月橋)쪽으로 한 10분 걸으니 미소라 히바리 관이 보였다. 지하 1층, 지상 3층 짜리 건물이었다. 미소라 히바리의 얼굴을 그린 큰 간판이 보였다. 영화간판같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1층 로비에는 미소라 히바리의 등신대 브론즈 상이 서 있었다.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먼저 3층으로 올라갔다. 관내에는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층마다 미소라 히바리의 음악·영화가 전시·연출되고 있었다. 레코드 판·영화 포스터·스틸 사진들...... 무척 풍요로웠다. 그리고 그녀의 일상 모든 것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녀의 거실과 아틀리에도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의자·소파·화장대...... 지하에서는 그녀의 보석·핸드백·신발·양산 등이 전시되고 그것을 리메이크한 제품을 팔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그녀가 즐기던 음식을 다시 만들어 내 놓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쓴 책들도 모두 모아져 있었다.

한마디로 굉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관객은 즐거워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만나고 있었다. 참으로 부러웠다.
 
우리도 지금까지 수많은 대중 가수와 영화배우가 있었는데, 그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는 얘기를 아직 못 들었다. 왜 우리는 없는가? 생각해 보면 우선 자료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수·영화배우는 우스운 것인가? 겸손한 것인가?

우리는 독립투사·정치가 등이 고작이다. 그리고 가 봐야 볼 것이 없다. 진열장 속의 책·자료가 손에 와 닫지 않기 때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미소라 히바리는 죽어서도 나 같은 방문객을 즐겁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국계?

지금 미소라 히바리((Misora Hibari, 美空 ひばり, 1937-89)를 아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 자신도 1970년대 신문 등을 통해 그 이름만 들어 알지 자세히는 몰랐다.

 

일본 노래를 알아들을 수 없어 그녀 이름 정도만 들어 본 정도였다. 그녀는 1940년대에서 80년대까지 40여 년 간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던 가수 겸 영화배우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소문이 있어 흥미를 가진 적이 있다. 일본의 국민적 스타의 피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기분 좋은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 자료관 어디에도 그런 힌트가 되는 자료는 없었다.

일본인이 낸 그녀의 전기 책 어디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만들어낸 얘기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우에다(植田剛彦)라는 일본인이 쓴 『재일 한국인의 저력』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 미소라 히바리는 한국계라고 하고 있다. 미소라 히바리가 죽은 뒤 나온 책이다.

“그녀의 재질은 바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미소라 악단’을 결성했을 정도로 노래를 좋아하고 노래에 자질이 있었는데 그 악단에서 가장 인기 있던 가수가 바로 미소라 히바리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책 어디에도 그녀의 부모 어느 쪽이 한국인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케다(池田憲一)란 사람이 쓴 『미소라 히바리 이야기』에는 한국계란 사실조차 적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그녀가 한국계라고 하는가?
 
미소라 히바리는 그녀가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까지 갈망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의 공연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이 한국이라는 것은 그녀 자신도 생전에 인정한 것입니다”

미소라의 어머니와 25년간 이웃처럼 지낸 스즈키(鈴木正文)씨의 말이다. 그러면서 스즈키는 “미소라씨의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한다는 꿈을 오래 동안 간직하며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라며 말 끝을 맺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1987년 8월 스즈키씨의 노력으로 한국의 세종문화회관에서 「미소하 히바리 한국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88년 올림픽 전야제인 ‘제1회 국제 아시아 가요제전’에 일본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미소라는 기쁨에 찬 얼굴로 “무엇이 있든지 꼭 한국에서 노래 부르고 말겠어요”라며 3~4곡의 노래를 한국어로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꿈을 이뤄내지 못한다. 1988년 4월 갑자기 찾아온 병마에 발목을 잡혀 후쿠오카에 긴급 입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사조처럼  몇 번 병원문을 나서기도 했지만 곧 재입원하다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데…”라는 염원을 스즈키에게 전화로 전하면서.

활짝 웃으며 사람들에게 행복과 편안함을 전해주던 그녀의 이면에는 아버지의 고향에서의 공연에 대한 동경이 절절히 베어 있었다.(월간 아리랑 1996년 1월호)

 일본의 대표적 인명사전을 한번 찾아보기로 한다. 그녀는 1937년 5월 29일 요코하마(橫浜) 인근, 요코스카(橫須賀) 시 이소고구(磯子區) 다키토오(瀧頭) 2정목(丁目)에서 생선장수로 지내던 가토 마스키치(加藤增吉)와 스와 기미에(諏訪喜美枝)의 첫 딸로 태어났다. 지붕 없는 시장의 가게, ‘어증(魚增)’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1936년 결혼, 이듬해 그녀를 낳은 것이다. 아버지 26세, 어머니 24세였다.

여기서 아버지 가토가 한국계라는 것이다. 가토는 어떻게 여기까지 건너와서 일본 여인과 결혼, 생업을 꾸리게 되었을까?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8년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란 정책을 발표, 전시체제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시에 태어난 것이다. 아마 무척 곤궁한 유아 시절을 지냈을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1년 후인 1938년 9월 19일에는 이복 여동생(勢津子)이 태어나고 있다.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미소라 히바리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지난 5월, 66세 생일을 맞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본명은 가토 히바리(加藤和枝)였다. 소화(昭和)시대의 화(和)와 어머니의 이름(喜美枝)에서 지(枝)를 따서 히바리(和枝)라 했다고 한다.

어린 그녀는 1945년 이후 폐허가 된 일본 땅에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 소녀 가수였다. 그녀는 10세가 넘어 가던 1947년 10월 때 인기를 끌면서 예명으로 미소라 히바리(美空和枝)라는 이름을 얻었다. 보통 히바리는 히라가나로 써서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라 했다.

그녀는 1947년 요코하마시 사쿠라기(櫻木)에서 열린 「시민노래자랑대회」에 출전, 소위 엔카(演歌) 작곡가인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78)의 작품인 「슬픈 죽피리(悲しき竹笛)」를 불러 절찬을 받았다.

고가 마사오는 서울 명동에서 태어나 명동에 있던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조선의 노래를 잘 알고, 전전·전후 시기 일본에 그 음악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했다. 1936년에는 선린상업학교 응원가를 작곡, 발표차 모교에 온 적이 있었다. 어린 미소라 히바리는 고가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밖에도 죽고나온 기념음반 「히바리 세카이 우다우」 세번째에 한국민요 ‘도라지’가 수록되어 있다.

가사는 일본말이고 후렴부분에 ‘에헤이요 에헤요’는 한국어로 또렷하게 불렀다. 아마 미소라 히바리의 엔카에는 어딘가 조선의 노래가 숨어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 도토산코에 있는 미소라 히바리 노래비

 

그녀는 이어 1949년 6월 쇼오치쿠 영화(松竹映畵)에 출연함과 동시에 주제가 「하동 부기 우기(河童 ブギウギ)」를 최초로 레코딩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었다. 동요를 부를 어린애가 유행가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도 부족 할 때 시타마치(下町)에 울려 퍼진 그 사랑스런 가성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희망의 응원가이기도 했다. 당시는 빙 그로스비가 히트를 칠 때였다.

‘부기 우기(boogie woogie)’라는 단어는 우리 귀에도 익은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불려지던 「기타 부기」(이재현 작사 작곡, 윤일로 노래, 1957)가 그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였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필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 부기 부기 우기 부기 부기 부기 우기 기타 부기
 
노래의 후렴이 ‘부기 부기’, ‘부기 우기’로 섞여서 불려지고 있었다. 부기 우긴가, 부기 부긴가 의아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원래는 부기 우기다.

부기 우기는 재즈용어로 1마디 8박으로 연주되는 블루스를 말한다고 한다. 1920년대 미국 시카고의 흑인가에서 피아노로 연주되던 것이 1930년대 후기 스윙 재즈가 전성기를 맞이하며 대중적이 되었다. 백인 밴드가 부기 우기를 연주하여 유행하였고 상업성을 띤 대중음악이 되었다.

부기 우기를 부르던 그녀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행복, 불행이 뒤섞였다. 노래와 영화 두 장르가 모두 그녀의 무대였다.

23세 때 부른 ‘애수의 부둣가’는 가난한 시대 일본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구원의 여신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가 지나며 그녀의 시대도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올드 팬의 사랑은 여전했다. 그 결과 그녀의 사후 자료관이 생겨 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89년 6월 24일 오전 0시 28분, 도쿄의 순천당(順天堂) 대학병원에서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영면했다. 아까운 52세였다. 사후 일본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7.4)했다. 도쿄 아오야마(靑山) 제장에서 영결식(7.22)이 치러졌다. 상주(喪主)는 남동생 가토(加藤益夫)의 아들 가즈야(和也, 1971- )였다. 그가 미소라 히바리의 양자였다.
 
그녀를 기리는 노래비, 동상도 일본 여기 저기 세워졌다. 그녀의 팬들은 홋카이도, 후쿠시마, 고치 그리고 오키나와에 노래비를 세웠다. 요코하마 시에는 동상도 세웠다. 그들은 이 시간에도 미소라 히바리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미소라 히바리 관에서는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하여튼 풀리지 않는 태생의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 연예계나 동포들 사이에는 그녀가 한국계라는 사실이 파다하게 알려져 있다. 과연 그녀는 한국계였을까?


 

김정동(목원대 교수,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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